003_『 Stationary at 9km/h 』(After the OpenClaw News)

Posted on : February 10, 2026

『 시속 9km의 정지 』

러닝머신의 벨트 위를 딛는 발바닥의 감각은 규칙적이었다. 시속 9km.
나는 나의 육체가 아직 쓸모 있게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에 보고하고 있었다. 회사를 떠나온 뒤에도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결재 라인 위에 서 있는 듯 했다. 사회인으로 보낸 지난 10년의 시간은 내 안의 날 것을 이미 지워버린 것일까. 남은 것은 증명하고 또 증명해야 한다는 관성 뿐, 태초의 나라는 감각은 이미 오래전 유실된 영혼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땀에 시야가 흐릿해질 때쯤, 정면의 헬스장 텔레비전의 화면이 바뀌었다. 한국 공중파 뉴스였다.
평소 같으면 흘려들었을 IT 단신이었다. 해외의 ‘오픈클로(OpenClaw)’가 AI가 자율적인 노동자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내용이었다. 글로벌 IT 보안 기업의 내부망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정보였음에도, 공중파 뉴스 화면으로 그것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것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숙련’이 레거시(Legacy)로 전락했다는 보고였다. 화면 속 아나운서의 음성은 마치 진공 속에 갇힌 소리처럼 공허하고 건조하게 흩어졌다.

다리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순간 상체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것은 공포라기보다 차가운 수치심에 가까웠다. 기업의 부품으로 살다 튀어나와, 내가 간신히 붙잡은 동아줄이 바로 AI였다. 한국 사교육의 중심지 대치동. 입시 미술 학원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친구들의 그림을 보며 느꼈던 그 질식할 것 같은 패배감. 화려한 타이틀을 거머쥔 그들 사이에서, 어정쩡한 기획력만 가진 내가 설 자리는 영영 없을 것 같았던 그 공포를, 나는 AI라는 강력한 ‘의수(義手)’를 달고 극복한 줄 알았다. 남들보다 디자인을 못해도 괜찮았다. 개발 속도가 느려도 상관없었다. 내겐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이해하는 머리가 있었고, 내 명령대로 움직여주는 AI가 있었으니까. 나는 비로소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고유한 위치를 찾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뉴스는 지금 그 명함이 곧 휴지 조각이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최근 고객들이 던지던 “왜 이렇게 비싸요?”라는 말이 비수처럼 다시 날아와 박혔다. “바이브코딩 이전 단가네요”라며 웹사이트 견적서를 본 고객의 말이다. 그때 내가 느꼈던 예민한 분노의 정체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것은 내 작업물의 가격을 깎는 것에 대한 화가 아니었다. 내 노동 가치가 껍데기라는 사실을 들킨 것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그토록 혐오했던 4050 상사들의 권위주의, 비합리적인 계급 사회. AI를 통해 그 견고한 벽을 넘어 도망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결국 더 거대하고 효율적인 시스템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젊음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표를 단, 조금 비싼 AI 인터페이스에 불과했던 것이다.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였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음울한 슬픔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근래 만났던 두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얘, 챗지피티에 물어보니까 내가 표현 못 하던 기획안이 술술 나오더라.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제 막 주부라는 긴 터널을 지나 일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한 엄마의 들뜬 목소리.
그녀가 곧 마주하게 될 “당신의 노동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라는 세상의 통보를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갱년기를 맞아 부쩍 늙었다며 호르몬이 만드는 신체적 불편을 호소하곤 했다.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사회인으로서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느낌을 그녀는 어떻게 감당할까. 그녀의 얼굴에 나를 비추어 보며 여전히 나는 러닝머신 위를 걸었다.

“제 딸에게 지금부터 뭘 준비시켜야 할까요? AI 시대에 살아남으려면요.”
차분한 눈빛으로 묻던 여성 대표님의 질문.
공적인 관계라 추측이지만, 그녀는 이혼을 했고 홀로 중학생 딸을 키우고 있다. 자매들과 함께 브랜드를 런칭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자 워킹맘이다. 평소 존경하는 그녀의 질문 뒤에, 대체 불가능한 ‘인격’ 그 자체를 상품화해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 특별하고 고귀해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는 함의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

기술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하겠다고 약속하겠지만, 그 해방의 끝에서 개인이 가장 처음 직면하는 과제는 ‘쓸모없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성실하게 땀 흘려 정진해온 노동의 가치를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업계 지인은 언젠가 내게 말했다.
미래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만 증명해도 돈이 나오는 기본소득의 시대가 올 거야.
말대로 미래에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 만으로 생존을 보장받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구원일까 재난일까. 차라리 그들이 부패하고 악한 존재들이었다면, AI에 의한 대체가 통쾌한 복수극처럼 속 시원했을지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의 일에 깊은 애정을 갖고 수없이 자신을 깎아낸 이들이 분명, 제법 많이 존재한다. 설사 그게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평생을 ‘무언가를 해내는 나’로 정의해온 이들에게, 노동이 사라진 삶은 곧 자아의 소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슴을 후비는 것은, 한 개인의 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던 그 가난과 분투의 서사들이 사실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지연된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다. 자본의 대척점에서 어느새 가난의 비릿한 상징이 되어버린 ‘노동’의 역사가, 기술이라는 차가운 세례 아래 그토록 허망하게 휘발 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 말이다.

나는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땀을 닦았다. 하얀 수건에 밴 온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이 비정한 기술의 연대기 속에서, 소멸해가는 것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했다. 기록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시속 0km, 정지된 내가 바라본 무한한 변화의 풍경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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