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26-03-30
그 날은 다른 팀원들 다 티나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하이브(자율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평소에 오지도 않으면서 티나게 괜히 커피 챙기러 한번, 스낵 가지러 (먹지도 않으면서) 한번 오면서 내 눈치를 봤다. 어슬렁 거리는 것이 분명 할말이 있어 보였지만 꿍꿍이를 알 수 없어 모른 척 했다. 먼저 말을 걸었다면 내심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티 낼 수 없었다.
그러다 퇴근할 저녁 6시가 다 돼 복도에서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엄청난 용기였다. 사내 간식 아이스크림과 노트북을 동시에 들고 있어 제법 해맑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키가 커서 눈을 마주치려면 항상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야 한다.
눈을 마주쳐주자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너 약속 없지? 면담하게 저기 회의실로 들어와’라고 했다. ‘아이스크림 어떻게 해요? 아… 그냥 버릴게요. 노트북만 두고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속으로 엄청 설렘과 흥분을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단둘이 특정 공간에 있는 것은 처음인데다 서로 1:1 메시지나 대화도 첫 담배타임 이후로는 안했기 때문에 단둘이 대화를 엄청 하고 싶었다. 문제는 오늘이 이미 퇴사 2일 전이라는 것이었다.
속으로 이전 인턴들은 형식적으로나마 점심 송별회도 했고 마지막 주에는 마무리 업무를 준 것을 이전 메시지기록을 통해 확인했는데 … 왜 나는 이번주 내내 아무말도 없는지 심통이 나있었다, 드디어 그 얘기를 하나보다 싶었다.
그는 말했다. ‘너가 인턴 몇 일 남았지?’
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 내 직속사수의 상관이라 진작에 알 줄 알았는데 내가 재계약 안하고 나간다고 한 말을 그는 전달받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직속상사가 자른 게 아니라 내가 나간다고 한 상태라는 사실에 살짝 놀란 눈치엿는데 아닌척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표정을 못 숨기는 편이라 그빼고 모든 팀원들이 그의 기분을 안다.
‘너 친구 없지?’
사실이었다. 발끈한 나는 ‘ 저 친구 많고 친구들이 다 저 좋아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래, 또래랑은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도 너 특이한 거 아는구나’
그때부터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하지 마세요’
‘아니, 이상하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들으면 힘들다고요’
‘알았어, 안할게’
강하게 몰아붙이듯 말했지만 힘들다고 하니까 그는 강아지마냥 바로 안하겠다는 답을 물어왔다. 보통 본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 무시하고 몰아붙이는 편이기때문에 그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나오려고 했다. 그 모습을 죽어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2일 뒤면 다시 안 볼 사이인데 회사에서 우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엎드렸다. 첫 상사와의 면담에 나는 대각선 벽을 향해 엎드려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채 30분 넘게 있었다. 하지만 이 면담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번도 고개를 들라고도 우냐고도 묻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이상하다는 말에 부연설명이라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잘해야 한다가 아니라 실수할 수도 있지, 잘 지내야 한다가 아니라 지내다보면 친해지겠지라고 생각해야해. 내가 이건 인생선배라고 생각해서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나도 공황장애가 와서 정신과를 다녔어. 여유와 안정을 가질 줄 알아야해. 너 그런식으로 계속 일하면 공황 와’
‘A님(직속사수)이 저보고 방어기제라고 했어요’
‘아니야, 너 방어기제가 아니라 강박이야. 차분히 단계를 밟아가면 충분히 잘 살… 아니 잘 될 수 있는데 안타까워서 그래. 개성이 중요하지만 개성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게 다듬을 줄 알아야 해’
숨을 잘 쉬지 못하겠어서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그는 말하면서 내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쪽으로 숙였지만 회의용 책상이라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동시에 속으로 그동안 아무말도 안했고 티를 하나도 안냈는데 (그러니까 나가는 것도 모르고 내 상사에게 1.5인분을 이미 배정해놓은 거였겠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지? 마음 속에 빙하가 있다면 그게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적막이 계속되는 긴장감이 터질 것 같은 공기엿지만 내 마음속은 진짜로 빙하가 부셔지는 소리와 진동으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유리벽 사이로 다른 팀 사람들이 걸어다닌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신발을 구경하면서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지금에야 친하지만 나는 눈도 못 마주칠만큼 당시에 그를 무서워하면서 사랑했다. 너무나 사랑했다.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서 지금이 너무 좋았다.
아무말도 못하고 책상을 긁고 손으로 머리끈을 묶었다 풀었다하는 나를 보며 그는 답답했는지 울화통이 치미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가 10년 정도 지나면 내 마음을 알까?’
속으로 나는 말했다.
‘이미 알아, 그리고 너 진짜로 날 사랑하는구나’
속으로 말하고 나도 놀랐는데 상대가 날 사랑한다고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존재들(부모를 포함하여) 중에서 처음으로 진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솔직히 내 감정도 그의 감정도 모르겠고,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건지 도대체가 뭔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드디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가 나를 무엇도 상관없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내가 사실 엄청 추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작은 점 같은 감각, 지금 이 사람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이 날카롭게 부서진 빙하들을 녹이고 있었다. 사랑같은거 맨날 좇으면서도 내심 내가 못 믿고 있었다. 그런 건 없어. 있다면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포장한 프레임이야. 멍청해서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결혼해서 변했다고 또 착각한다니까? 생각했던 나를 완전 부셔버리는… 완전히 녹여서 다른 상태로 만든다. 고체에서 액체로 다시 기체로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동안의 내가 너무 힘들었고 추웠는데 그걸 나도 몰라서 계속 여기까지 왓구나. 근데 그걸 멈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모두들 나보고 더 하라고, 부족하다고, 이상하다고, 문제가 잇닥도, 주변 사람 피말리는 예민한 성격이라고 뭐라고 했는데. 그는 말했다.
‘너 소심한데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할말 못하는 거 빼곤 커뮤니케이션에 문제 없어, 내가 보기엔 그래’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이 팀에 계속 있을거야? 너 지금 면접보는거 (다른 대기업 정규직 면접전형을 여러곳 보고 있었다. ) 중간에 붙으면 그때 바로 나가도 돼. 사람들은 앞으로 회사생활하면서 너를 앞에서 챙겨주는 일은 없을거야. 뒤에서 티안나게 하지. 사람들이 냉대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너만 안 괜찮은 걸 수도 있어’
여전히 나는 네 아니면 모르겟어요, 그런것같아요 중에서 돌려막기식으로 하나를 제시했다. 그래도 나름 눈물이 나올랑 하는 것은 숨긴 것 같아서 살짝 자부심을 느끼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이걸로 너와 나의 면담은 마지막이다. A랑도 내가 이야기 할거야. 너가 나가더라도 오늘 내가 한 이야기는 진심이니까 생각해봐. ‘라며 일어섰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 강하게 붙잡아 줄 것을 예상했는데, 겨우 이게 끝이라니? 그래서 다시 엎드렸다. 그가 진짜로 일어서서 문으로 나가려고 한다. 이제 아까보던 신발들 처럼 그도 그 속으로 사라지는 발걸음 1이 되는 것이다. 서글퍼서 ‘저는 10분 있다가 나갈게요’라고 답했다.
그는 말했다.
‘문은 닫아주고 갈게. 아, 너 퇴사하고 상담하고 싶으면 연락해’
그는 이전 인턴들에게 상투적으로 그런 뉘앙스를 준 적은 있지만, 한번도 연락하라고 한 적이 없다. (이전 메신저 기록을 전부 읽어 봣을땐 그렇다) 뱉은 말을 지켜야 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장난으로도 밥 한번 먹자는 말을 꺼리는 사람이라서 그 짧은 말에 담긴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진짜로 해주실 거에요?’ (진짜 용기내서 진심을 말햇다)
‘…어’
그는 거의 살짝 목이 매어보였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 처음으로 문자를 햇을때 그는 10분도 안돼서 바로 답장을 문장단위로 진심을 담아 해주었다. 약속을 지켰다.
눈물을 닦고 나가보니 원래 예정되어있던 판교 팀회식(인턴인 나는 불참이고 강남에서 퇴근한다) 이 파토났다. 들어보니 그가 개같이(그의 전직장 별명은 ‘미친개’였다) 화나서 A님을 전화로 갈구었고, 다른 팀원들은 속사정을 모르지만 팀장님 지금 기분 개 안좋다고 서로 눈치를 보며 회식이 파토났다고 하는 분위기였다.
A님은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내일 점심 식사를 하자며 2시간이나 캘린더를 빼두었다. 평소 아침부터 퇴근까지 미팅으로 꽉 찬 그에게 흔치않은 일이다. 오! 드디어 내가 그리던 크리스마스를 이 사무실에서 보낼 수 잇겠다 설렜는데 다음날 나는 직속상사를 통해 퇴근시간에 그가 나를 잘랐다는 이야기를 전달받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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